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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창근] '아이티'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돌아보며


'아이티'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돌아보며

ㅡ가난한 휴머니즘, 존엄한 가난을 위하여


염창근





절망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아이티

지난 한 달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작은 나라 하나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새해의 희망 섞인 인사가 아직 한창이던 지난 1월 13일, 관심은커녕 그런 나라가 있는지 이름도 생소한 카리브 해의 섬나라 아이티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많은 한국인에게도 아픔으로 다가왔다. 집들이 붕괴되어 수십 만 명의 아이티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장면이 뉴스를 타고 연일 보도되었고, 소식을 마주한 사람들은 마음으로나마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했다.  

한 달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원의 손길과 관심이 식지 않은 모습은, 가난한 땅을 뒤엎은 지진의 피해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분명 예전과 달라진 점을 느끼게 한다. 일시적으로 증폭되었다가 사라지는 뉴스거리가 아니라 참담한 슬픔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서려는 모습이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포함해 나라의 절반이 지진으로 무너지고, 인구의 1/3에 달하는 300만 명이 집을 잃고 길에서 삶을 이어가고, 살아남았지만 최소한의 식량도 없이 참혹한 생활을 버텨야 하는 아이티 사람들을 향한 그 마음들은 고난 속에서도 지속하는 삶에 대해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마음들과는 달리 아이티를 바라보는 어떤 시선들은 불쾌했고, 분노를 일게 했다. 특히 대다수 언론매체의 보도는 사실을 호도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이티를 보는 시선을 왜곡시키고 나아가 이를 조장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아이티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는 그 뉴스와 보도들은 ‘세계 최빈국’과 ‘높은 문맹률’을 줄기차게 떠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티 정부나 국민이나 무능하고 무식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유엔과 국제사회가 아이티를 돕고 싶어도 구호품을 차지하기 위해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아이티 사람들 때문에 구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도할 때는 왜곡을 넘어 모종의 음모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진흙쿠키’로 상징화된 아이티의 이미지는, 외세에 의한 그들의 오래되고 고단한 핍박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티 사람들의 국민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표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새삼 물을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선진국의 원조를 받아야 하는 나라, 자력으로는 질서 회복이 불가능하니 외국 군대로 통제되어야 하는 나라, 경제는 최악이고 사회는 야만적이니 강대국과 국제기구가 관리해야 하는 나라 등등의 논리가 먹혀들고 아이티에 대한 개입 강화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언론매체의 위력 앞에 붙들리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시선에도 어쩌면 이런 관점이 달라붙어 버리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아이티를 바라보는 시선

저렇게 적게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무런 길이 없는 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이두부 옮김, 14쪽)

아이티는 가난하다. 그리고 문맹률도 높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반드시 무능하다고 할 수 없으며, 문자를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다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시선은 서구의 관점인 것은 아닐까? 가난하다고, 문맹이라고 다 절망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거기에다 ‘흑인’이라는 시선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서구의 주류 경제학에서 계산하는 경제 지표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이티는 한없이 가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아이티 사람들이 무능한 원인이 되고 개입받아야 할 이유로 설명될 수는 없다. 문맹률이 높다는 것이 다 수준 낮고 폭력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구호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집이 무너져 갈 곳도 없으며 누군가가 먹을 것을 전해 주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처지라면 아마도 그 누구라도 살기 위한 갖은 몸부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단순히 견디는 문제가 아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미쳐가고 있다”고 제목을 크게 뽑아 보도하는 행태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해서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을 호도하고 나아가 ‘그래서 통제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주입시킨다. 조금만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더라도, 저처럼 극단적 상황이라면 한국은 물론 제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나라들도 혼란 상태는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생존의 문제가 다급한 사람에게 외국의 군인과 구호단체가 오만하고 모욕적으로 구호품을 던져 주는 행위에 대해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헬기로 구호품을 떨어뜨리고 트럭에서 집어던진다면 그 구호품을 받을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구호품을 투하하는 자들의 행위에서 아이티 민중들을 인간으로 보는 시선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이티 사람들은 단지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 먹을 것을 던져 주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거지 떼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그냥 들여다보기만 하더라도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저토록 심각한 처지에다가 외국 군인들의 굴욕적인 배급을 받는다면 폭력 사태가 크게 번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인내하며 이겨내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성숙한 인간의 노력과 그 인간들이 만들어 간 사회의 수준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면 너무 과한 추측일까. 지금껏 집단적 폭동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서로를 배려해 온 아이티 민중의 모습이 이면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진실이 아닐까.

아이티의 소식을 사실대로 전하려는 작은 언론사들은 주류 언론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티 전역에서 주민들은 스스로 조직을 꾸려 현장을 수습하고 잔해를 치우고 시신을 찾고 난민수용소를 설치하고 치안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아이티는 치안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군인들이 환자들의 병원 접근을 막고 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구호품과 의료진은 오지 않았다’ 등등.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티에 개입해 왔던 빌 클린턴 전 미대통령조차 “그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 시체와 뒤섞여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는 걸 고려하면 이들은 아주 훌륭히 대처하고 있다. … 아이티인들은 놀라운 국민이다”라고 심경을 말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수백 년간 외국 군인들에게 학살당하고 점령당해 본 경험을 가진 아이티 민중들이 외국 군인에게 가졌을 증오까지 생각해 본다면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 걸까.

이백 년 동안이나 아이티 사람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시골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문맹 퇴치 캠페인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 자리에 있던 1991년과 1994년에 해외 기부자들에게 몇 번이고 성인 문자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호소했을 때, 그 분들이 저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같은 책, 99쪽)

사실 아이티의 가난함은 그들의 잘못이 결코 아니며 무능 때문도 아님은 세계사가 다 기록하고 있는 일이다. 아이티는 유럽 국가들의 오랜 식민지배와 착취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흑인 노예 해방을 이루었던 나라이며,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독립 국가를 이룬 나라다. 그리고 예전의 아이티 사람들은 세계의 풍요를 생산해 왔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당시 아이티는 ‘세계에서 소비되는 설탕과 커피의 절반을 생산했고 프랑스 교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한다. 아이티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 프랑스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의 배보다 훨씬 많았고 식민지 열세 곳에서 모은 곳보다 훨씬 많은 부를 만들어 냈다.

문맹률에 관해서도 결코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티 민중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높지만 부채와 배상금라는 이름으로 강대국이 강제로 저당 잡은 가난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이티 사람들은 크리올 어를 쓰지만 ‘이백 년 동안 사법 체계, 교육 체계를 비롯한 모든 정부 업무가 프랑스 말로, 그 말로 쓰인 문서로 집행되었’고, 따라서 ‘지명, 출생증명서 따위의 모든 것이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따로 배워야 했다.

아이티 사람들이 얼마나 배움에 굶주려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아이티 국민들이 자기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 아이티에서는 9월 10월을 가장 잔혹한 달로 꼽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이때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 100쪽)

폭도들이 곳곳에서 창궐한다는 이야기가 나돌 때 우연처럼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과 유엔이 군대를 파병한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보인다. 혹시 아이티 사람들이 구호품 다툼을 하고 물품을 약탈하고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를 미국과 유엔이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반문해 보는 일은 극단적인 의심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이 치안과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파병을 한다는 논리의 이면을 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벌여 왔던 그들의 작태가 반복되는 것 같기에. 얼마나 신속히 파병했는지를 보면 마치 준비라도 한 것만 같다.  

빈민의 아버지로, 해방신학의 모범으로 늘 아이티 민중의 편에서 민중과 함께 독재에 투쟁했고 그래서 압도적 지지로 네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던 아리스티드를 네 번 모두 끌어내린 장본인이 바로 미국과 유엔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미국은 민중을 학살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강간했던 군부에게 군사 쿠데타를 부추겼고 유엔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사실상 아이티를 점령해 왔다.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거부해 온 것도 그들이며 군부독재 시절의 군대와 경찰을 훈련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심지어 유엔평화유지군이 직접 아이티 시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이 아이티를 끝까지 장악하려던 이유는, 식민지배와 독재를 물리친 아이티가 미국 중심의 세계화(지구화) 방식을 거부했기 때문이었고 또 미국의 앞바다인 카리브 해에 자기를 거부하는 쿠바나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가 또 하나 생겨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카리브 해를 전략적ㆍ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삼고 중미 지역 전체를 영향권 아래 놓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가장 풍요로웠던 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하지만 아이티 민중들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아이티의 가난한 휴머니즘

“이것이 더 효율적이다.” 경제학자들은 말합니다. “당신네들의 시장, 당신들의 삶의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다.” 경제학자들은 또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습니다. “모든 거래를 숫자로 환원시킬 때, 당신들이 인간적인 것을 모두 사라지게 했을 때,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같은 책, 27쪽)

『가난한 휴머니즘』이라는 책이 있다.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민중의 대통령이었던 아리스티드 신부가 아이티 민중의 ‘존엄한 가난’에 대해, 아이티가 어떻게 오랜 세월 외세와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직접민주주의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에 대해 세계인에게 편지를 띄우는 책이다. 소위 말하는 ‘부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인간의 길을 택한 아이티 민중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근본에서부터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가난했지만 존엄했던, 인간의 영혼을 지키려고 했던 때가 있었다. 풍족해진 지금보다 그때에 오히려 빛나는 인간을 무수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아이티 민중은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함이나 문맹률 따위는 이 길에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일지만,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구원자’들이 군사적ㆍ경제적 개입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매스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휴머니즘에 반하는 주류 경제학의 잣대로 아이티를 보는 것은 현재의 아이티의 어려움을 보며 휴머니즘을 찾는 일과 모순이다.

세계 주류의 경제 질서와 세계화를 거부하다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어려움에 빠지자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아이티의 절절한 노력이 있다.

이 딜레마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딜레마입니다. 바로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지요.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구적 경제 체제로 들어가든, 지구적 경제화를 거부해서 서서히 굶어죽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의 길을 찾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시급합니다. (같은 책, 36쪽)

아이티 토종 돼지인 크리올 돼지의 멸종 이야기는 이에 관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0년대 아이티 토종 돼지가 전멸했던 역사는 지구화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아이티 사람들이 아주 정성스럽게 길렀고, 아이티 기후와 조건에 잘 적응한 돼지였습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 찌꺼기를 먹을 뿐 아니라 음식 없이도 사흘은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시골 가구의 80~85퍼센트는 돼지를 기르는데, 돼지를 기르는 것은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노릇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장례나 결혼, 세례 같은 일을 치를 때, 병을 앓을 때, 새 학기가 시작하는 10월에 학비나 책값을 지불해야 할 때 팔아서 요긴하게 썼습니다.
1982년 국제기구는 아이티의 농민들에게 돼지가 병들었으니 그 질병이 북쪽의 다른 나라로 퍼지지 않게 도살해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병든 돼지 대신 더 나은 돼지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개발 프로젝트에서도 보기 힘든 고도의 효율성으로, 13개월 동안 크리올 돼지들은 모두 도살되었습니다.
2년 후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크리올 돼지보다 더 낫다는 새 돼지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돼지들은 워낙 훌륭한지라 아이티 인구의 80퍼센트가 식수난에 처해 있는데도 깨끗한 식수를 먹게 해야 했고, 당시 아이티의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태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하는 데다가 덮개가 있는 돼지우리까지 있어야 했습니다. 아이티 농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돼지들에게 ‘네 발 달린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기의 맛도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같은 책, 31~32쪽)

지진 피해 때문에 관심이 모아졌지만 아이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식민지배, 군부독재, 내란, 쿠데타, 점령, 학살, 빈곤, 문맹, 위험, 무능, 불평등 따위의 어두운 이미지만 가득해졌다. 그러나 아이티는 그런 말들로만 채워질 나라가 아니다.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이겨내고,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쿠데타를 이겨내고, 개입과 가난을 이겨내고 있다. 300년간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에 싸워 노예 해방과 독립을 이루었고, 자기 입맛에 맞는 아이티를 만들고 싶었던 미국이 지원한 군사독재를 비폭력 투쟁으로 몰아냈고, 34차례의 쿠데타도 넘어왔고, 불가능해 보였던 군대 해체를 실현했다. 그리고 미국의 개입 속에서도 민주와 평화의 아이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도전들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도 아리스티드는 복귀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민중과 함께 만든 수많은 민중자치조직들은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번 지진으로 아이티는 분명 큰 어려움에 처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티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이번 지진보다 훨씬 극심했던 상황을 끊임없이 겪어 왔고, 견디고 투쟁하며 극복했던 힘을 간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순히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로 재단되고 있는 오늘날, 이 점을 다시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혼란을 막으려면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말들이 열강들 입을 통해 횡행하고, 구호 활동이나 지원 활동이 아이티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한 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그 속내를 의심스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조차 이겨내기를, 비록 가난하더라도 환경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택한 아이티가 꼭 성공하기를, 그래서 이 세계에 하나의 모델이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요즘이다.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겨내려 노력하고 있는 아이티 민중과, 진심으로 아이티 민중과 함께하려는 활동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며.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아이티 정부가 국제기구의 지시를 계속 따른다면 우리는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맴돌 뿐,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면 민중들에게 전략을 구하는 시민사회 사이에서 아이티의 조직들을 본다는 것은 한밤중에 촛불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절망의 암흑에서 만난 희망! 우린 대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대안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를 굶주림에서 꺼내어 ‘존엄한 가난’으로 이끌 것이라 봅니다. 우리의 제안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한다면, 그들 국제기구의 제안도 얼마나 파멸적인 것인지 이미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같은 책, 92~93쪽)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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