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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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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창근] 신은 칼을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신은 칼을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 불화(不和)의 근본주의와 폭력

염창근


가라, 우리의 땅과 해변과 바다로부터
우리의 밀과 소금, 그리고 상처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 너희가 갈 때다.
(마흐무드 다르위쉬, 〈너희에겐 칼이, 우리에겐 피가〉 중에서)


세계를 나누는 새로운 분할선의 등장

몇 년 전, 한 토론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의 투쟁과 하마스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함께 배석했던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은 통역을 듣고선 침통한 얼굴을 지었다. 팔레스타인 정당인 하마스가 선거를 통해 의석의 61%를 획득해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탱크로 전투기로 폭탄을 퍼부으면서 평화협상에 나오라는 이스라엘이나 이를 지원하는 서구, 그리고 선거에서 진 다른 팔레스타인 정당 파타가 하마스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폭력적 방식이나 무장저항 방식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몇 차례나 말했음에도 곧장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혐의가 따라붙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물론 하마스는 오래 전부터 무장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력으로 저항해 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슬람주의를 근간으로 삼았다. 여성에게 이슬람 방식의 복장을 강요한 적도 있었고 서구의 구호단체는 개종의 미끼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마스가 선거에 불참하다 나선 2006년 총선에서 단번에 여당이 된 이유는 아랍권에서도 가장 세속적이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 이슬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는 그동안 집권해온 파타가 이스라엘과 뒷거래로 자기 배만 불리고 있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부패한 파타에 대한 심판이 정권교체로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마스 역시 선거에 나서면서 자신이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한다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점령을 ‘평화’라고 말하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관용적이다.
2010년 5월 오사마 빈라덴이 미국 특공대로부터 사살된 후, 한 정보과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빈라덴 추모 행사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지만, 정중히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 어디에서도 추모하겠다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을 땐 ‘그러냐?’하며 그는 의구심을 풀지 못한 채 연신 갸우뚱거렸다.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중동 사람들의 목소리에 공감해 보려는 시도나 아랍과 공존을 모색해야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가? 팔레스타인 친구가 한국에 와서 반드시 받게 되는 질문은, ‘하마스냐? 파타냐?’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왜 우리에게 표상하는 이미지는 단 둘 뿐일까? 친서구적인 무슬림은 선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무슬림이라는 이분법이 이미 견고하게 굳어져 버린 것일까.
1990년대에 확산되기 시작해 2001년 9ㆍ11 사건을 계기로 전 세계에 유포된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말은 오늘날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세계를 분할하듯 우리의 인식을 이분법으로 나누었는데, 새로이 생겨난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잣대는 엄밀히 말해 누군가로부터 규정된 것이었다. ‘온건한 이슬람’과 구별해 사용된 이 언명은 어느새 이슬람과 중동과 아랍 전체에 혐의를 씌우는 죄명이 되었다. 세계적 인구 규모에서 볼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최근 들어 많은 지지자가 생겨났다 해도 여전히 소수인데, 마치 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문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할 때는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적이 나타난 것처럼 다룬다.
대다수 언론매체의 보도가 여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분쟁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는 그 뉴스와 보도들은 ‘이슬람’과 ‘근본주의’와 ‘폭력’과 ‘테러’를 줄기차게 연계했고, 이슬람과 근본주의와 폭력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국제사회가 중동을 도와 평화를 만들고 싶어도 이슬람을 확산하기 위해 폭력을 일삼는 테러리스트 무리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도할 때는 왜곡을 넘어 본말을 전도시켜 모종의 음모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새삼 물을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외국 군대로 통제되어야 하고, 무장해제되어야 하며, 야만적이고 잔인하니 국제사회(강대국)가 관리해야 한다는 등등의 논리가 먹혀들고,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언론매체의 위력 앞에 붙들리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시선에도 어쩌면 이런 관점이 달라붙어 버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슬람 근본주의는 새로이 창조되었고 적극적으로 유포되었다. 전쟁이 정당화되었고, 이에 맞선 싸움들은 고립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분할의 경계에서 근본주의가 그 모든 것을 먹고 자랐다. 근본주의는 어느 사회에나 있을 수 있지만, 설 자리가 미미한 근본주의에게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때는 바로 이런 시기이다.

근본주의의 지형


근본주의는 공존에 대한 거부다. 종교 근본주의를 포함해 모든 근본주의들은 공존으로 생겨나는 변화를 거부한다. 올해 7월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 테러는 오늘날 근본주의의 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테러는 한 사이코패스의 돌발적 행위가 아니었다.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노르웨이 총리 관저를 향해 폭탄 테러를 일으킨 후 집권 노동당의 청년단체가 수련회 중이던 우토야섬에 난입해 76명의 청소년을 총기로 사살했다. 처음 노르웨이 총리 관저에 폭탄이 터졌을 때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은 이슬람교도의 소행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범인이 잡히고 그가 기독교도임이 밝혀지면서, 평등과 신뢰의 사회민주주의 사회라는 노르웨이는 물론 유럽이 충격에 빠진 듯 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는지 혹은 근본주의 신앙에 따라 행위를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근본주의와 큰 공통점이 있으며 근본주의의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쓴 1500쪽 분량의 선언문 ‘2083년 유럽독립전쟁’에는 노르웨이에 만연한 다문화주의, 관용적 이민정책, 타인종에 대한 개방, 개방적 종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적으로 규정했다. 특히 이슬람 이민자의 유입을 당면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는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노르웨이의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 적들을 응징해야 하며, 이는 이슬람의 침략과 식민화 위협에 대한 저항운동이자 이민에 관용적인 노동당 정권에 대해 투쟁이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 노르웨이를 위협하는 것은 이슬람 이민자이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노동당 정부와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좌파 등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브레이비크는 테러 대상으로 이슬람 사원이 아니라 노동당을 선택했다. 더욱이 이슬람에 맞서 의연히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반이스라엘 운동을 펼치는 노동당 청년단체를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브레이비크의 주장은 근본주의라는 개념을 태동시킨 100년 전의 미국 보수 개신교 운동과 동일한 유형을 보인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 집단은 자유주의 신학, 현대주의, 성서비평주의, 진화론 등에 대항하기 위해 근본주의를 제창했지만 사회적으로는 타인종ㆍ이민자에 대한 개방적인 문화, 위계질서와 계급사회를 철폐하려던 좌파와 마르크스주의, 전통적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페미니즘 등의 확산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이는 근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인데, 사회 변화에 반동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내부에서 확산되던 좌파 사상과 서구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것들이 퇴폐적인 성문화를 조장한다고 규정하면서 지하드(성전)를 외쳤다.
종교에서는 악은 물론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 이교도, 금기사항도 규정하고 있기에 근본주의적 경향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있어 왔다. 하지만 발현되는 맥락을 볼 때 근본주의 자체가 지극히 사회적이었다. 근본주의는 공존과 그에 따른 논쟁과 변화,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이 생겨날 때 이를 기존의 정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항하는 운동으로 펼쳐진다. 서구에서는 이민의 문제가, 이슬람권에서는 서구 문화와 사상의 유입이 그것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교리에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주의주장 혹은 순수의 ‘과거’가 좋았다며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그 정통주의 교리를 믿는 것을 뜻하지만 교리 해석은 인간이 하며 종교 역시 사회적인 것이기에 근본주의는 종교적 이념성에만 머물 수 없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언명이 ‘타락’인데, 근본주의가 초기의 원리, 이른바 정통적 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을 표방한 뜻은 인간 일반을 향해 세속화(변화)를 저지하고 이질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로 작동한다. 이러한 체제적 동질화가 안정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의 본질로 삼는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는 종교 사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현상으로 봐야한다. ‘기독교 문명’을 지키기 위해 결행했다는 브레이비크의 사례와 같이 근본주의는 교리상의 맹신을 넘어 정치적 행위로서 ‘배제’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스라엘, 인도는 근본주의 정치가 지배하는 대표적인 나라들이지만 이들 나라의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배제의 정치를 멈추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현존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중 진정한 무슬림은 없고 모두 교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자국의 1억 3천만 무슬림을 너무 부드럽게 대하고 옛 이슬람 사원들을 모두 헐어 힌두교 사원을 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만이 높다. 정통 유대 근본주의자들은 세속적(현대적) 이스라엘 국가를 불명예로 간주한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9ㆍ11 테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용인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단지 백악관을 장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의 지형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새로운 변화들로 생겨나는 불안이나 누적된 불만이 클수록 한 가지 원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자 하는 근본주의 흐름에 사람들이 동조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수 정치가 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파시즘, 나치즘이 그러하며 종교 근본주의도 매번 그러했다. 테러라는 방식은 잘못되었지만 브레이비크의 생각에는 찬동했던 사람들은 유럽 극우파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존재로서 이민자는 백인사회의 전통을 훼손하는 것으로, 이슬람교의 유입은 문화적으로 인구학적으로 서구 사회가 위협받는 것으로 주장하는 일은 유럽의 온건 우파 정치도 상용하는 효과적인 선전수단이었다. 서구에서 타인종 혐오는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사회 분위기로 부각될 때는 개개인이 먼저 극단화될 수 있다. 인종주의의 활개, 보수파의 극우화, 그리고 미국 신보수주의가 오바마 대통령을 이슬람교 잠입자로 여기며 출생증명서 공개를 요구했던 점 등을 볼 때 막연한 두려움을 조장하며 자기 세력을 넓히려는 이들에 의해 개개인은 극우주의와 더욱 쉽게 상통한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 자신의 가족과 지역과 사회와 종교를 지켜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으로 파생되고 마는 것이다. 보수 정치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여기로 끌어들인다. 그것이 공론장에서 분출될 때는 그나마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지만 삶이 팍팍해지면 공존이 거부되고 위협의 혐의는 사적으로도 자리 잡는다.

두 가지 근본주의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서구(미국)의 지원으로 자랐다는 점에서 다른 근본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이는 오늘날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심 고리이다.
대부분 서구인의 인식과 달리 이슬람 세계는 종교의 틀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세계가 아니었다. 이슬람 사회들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세계적 변화의 흐름을 알았고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대부분 근대성을 받아들였다. 이슬람을 역사로서 존중했지만 조직화된 종교는 시대착오였음을 깨달았다. 혁명과 전쟁의 열기를 느꼈고 다양한 운동들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흐름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이 운동들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켰고 유럽의 식민 지배 시기에는 강력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지난 세기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는 공통적으로 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운동 세력을 형성했다. 계속된 전쟁 패배와 강대국의 지배의 영향으로 주로 좌파 공산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대안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았음에도 강력한 조직적 운동으로 드러내지 못한 탓에 독자적 흐름을 만들지 못했고 주로 공산주의와 협력했다.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던 시기에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혀 유력한 후보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 특히 미국은 이슬람 사회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자기의 이익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좌파 공산주의나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자본주의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을 지원했는데, 한편으로는 미국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왕들과 독재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들이 그들이었다. 이슬람의 규정에서 이탈해 좌파적으로 세속화되어 가던 중동에 미국은 이슬람 지하드 개념을 역이용해 비밀공작을 펼쳤다. 근본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이라는 악보다는 자국의 세속 정부라는 악을 먼저 척결해야 했고 서구의 지원 덕분에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 될 수 있었다.
4차례의 중동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 먼저 좌파가 제거되었다. 이란의 성직자들은 혁명으로 만개한 민주주의를 영원히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에는 민족주의가 굴복했다. 사다트의 뒤를 이은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구시대적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로 사회적ㆍ문화적 영역을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게 넘겼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브주의가 지속되었고, 요르단 등 군주정들과 독재정권들은 연명되었으며, 많은 나라에서는 좌파 정부가 전복되고, 이란과 아프간에서 성직자들과 근본주의가 권력을 잡았고, 이집트와 알제리 등에서는 근본주의 단체들이 대중적으로 등장했다. 결정적으로 1991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차원이 다른 전쟁으로 단번에 군사강국 이라크를 제압한 걸프전에서 너무나 막강한 미국의 힘을 목격한 아랍 세계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근대적 추진력들이 패배하는 동안 이슬람 근본주의는 곧바로 그 자리를 메웠다. 확성기를 단 모스크에서는 사탄에 맞서 깊은 신앙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조직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지적인 삶은 위축되었고, 이슬람은 경직되고 퇴행적인 종교로 변해갔다.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은 카페에서 끊임없이 만났지만 어디까지나 거기서만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들이 남아 있었다. 긴 어둠의 시기 이슬람 세계에 경직된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닌 비판적 정신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은 망명한 시인들이었다. 팔레스타인 태생의 마흐무드 다르위쉬, 시리아 태생의 니자르 카바니, 이라크 태생의 무타파 알나왑 등 시인들은 강대국들의 침략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아랍 사회 내부의 문제를 비판했다. 카바니가 1967년 전쟁이 끝나고 쓴 〈패배의 서에 대한 주석〉이라는 시 20편은 누구도 예외로 삼지 않고 아랍의 모든 지도자들을 비판했고, 이후 위대한 시인들은 끝까지 비판적 지성을 견지해 갔다. 시인들의 시는 아랍 각국의 정부로부터 판금되었지만 아랍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었고, 아랍의 가장 유명한 가수들이 노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6년에 모든 금기와 제약을 타파하는 TV방송 ‘알자지라’가 이곳에 등장했다. 알자지라의 기자들은 어떤 정치적 배제 없이 모든 이들을 인터뷰하며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고, 출연자들은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밀도 깊은 토론의 공간을 열었다. 알자지라는 아랍 세계의 잘못된 점을 냉정하게 분석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고양시켰고, 중동에서의 전쟁과 분쟁 취재는 서구의 메이저 매체조차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그 현장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매체라고는 국영매체밖에 없었고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곤 들어본 적이 없었던 중동의 아랍인들은 즉각 모든 국영 방송매체를 끊어버리고 알자지라로 옮겨 탔다. 알자지라의 기자와 토크쇼에 출현한 인사들은 아랍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아랍의 왕들과 독재자들은 극도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위기감을 표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다. 알제리, 이집트, 예멘, 바레인, 리비아, 시리아, 요르단, 오만, 사우디 등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2011년 민중들의 봉기는 전혀 새로운 세대들의 의해 오랜 시간 준비된 것이었다. 독재와 부패, 가혹한 인권 탄압, 빈곤과 빈부격차를 철폐하기 위해 그동안 숨죽이며 살았던 아랍인들이 분노와 모멸감을 스스로 넘어서기로 했다. 아랍의 봄은, 이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독재정권뿐만 아니라 이슬람 종교까지 각종 권위주의들을 문제 삼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이 아니었다. 자기네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군주제의 왕정국가와 군사독재정권이 대다수인 중동의 지배층은 깜짝 놀랐고 중동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분주했다. 그러나 아랍의 민중은 중동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미국과 유럽은 겉으로는 아랍의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친미의 왕정들만은 지키고자 애를 썼다. 민주주의와 민간인 보호를 명분으로 리비아 등에는 군사개입을 하면서도 왕정 군주들의 민주화 시위 진압을 묵과했다.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잃지 않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봉기가 한창이던 5월 1일, 갑자기 빈라덴을 사살했다. 아랍의 봄에 대한 미국의 이 화답을 시리아 저널리스트 마르얌 하산은 이렇게 정리했다. “억눌려 있던 아랍세계가 현대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적인 투쟁을 통해 역사의 새 장을 넘기는 시점에 빈라덴이 사살됐다.”
중동의 혁명과 봉기에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존재는 없었다. 아랍의 봄은, 이슬람 근본주의 방식이 변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를 원하지도 않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포장하는 빈라덴 사살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전쟁의 정당성과 중동 패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내민 카드였다. 혁명과 봉기 중에 사라졌던 이슬람 근본주의에게 새로운 보복의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다시 번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전쟁에 협력해 온 친미 독재국가들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다. 아랍 민중에게 넘어가던 중동의 새 흐름은 미국의 빈라덴 사살, 서구의 리비아 군사개입과 맞물리며 수그러들었다.

파키스탄 출신 문학가 타리크 알리는 이런 미국의 태도를 두고 ‘미국의 근본주의’라고 일갈한 바 있다. 제국주의와 군사주의라는 미국의 근본주의야말로 오늘날 가장 위험한 근본주의이며 모든 근본주의의 어머니라는 그의 통찰은 오늘날의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명확하게 해준다.
경제적ㆍ군사적 능력으로 모든 영역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은 반세기만에 ‘유일한 현실’이 되었고,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되었다. 20세기 혁명과 전쟁과 냉전의 시기에는 소련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언어였고, 20세기 말 소련의 붕괴로 미국의 승리는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군사적 패권을 쥔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이제 너무나 자명해진 나머지, 한때 미국이 힘을 행사하는 방식을 비판했던 사람들조차 표정을 바꾸게 했고 진부한 찬사를 늘어놓게 만들었다. 미국은 항상 옳으며 무조건 선하며 언제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미국을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 자체가 교리가 되어 왔다. 그리하여 지구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이자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라보는 이러한 미국 숭배는 과거의 다른 어떤 근본주의보다 더한 미국 근본주의를 집약한다.
그러나 미국은 양극의 냉전이 끝난(1992년) 후 10년 동안 세계 군비는 50%가 줄었고 미국의 군비도 28%가 줄어드는 사태를 목도했다. 군비 감축 경향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포되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 급감하던 세계의 군사비를 다시 급격히 끌어올렸다. 소련의 붕괴는 미국을 고민스럽게 한 것일까? 분쟁이 없다면 군산복합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 것일까? 새로운 적은 재빨리 만들어졌다. 미국의 제국주의와 군사주의는 다시 떳떳하게 자신의 활개를 폈다. 미국은 아픈 비극을 세계를 재편성하는 도덕적 잣대로 써먹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가 있고 한 달 후 아프가스탄 침공이 시작된 어느 날, 부시 미대통령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 나라인데 일부 이슬람권 나라들의 미국을 향해 격렬한 증오심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세계에 선언했다. 그것은 미국 근본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착한 나라 미국’은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근본주의적 믿음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이슬람권을 공격함으로써 전 세계를 폭력적으로 훈육하기로 결심했다. 아프간 공격은 세계의 찬사를 받으며 전개되었고, 이라크 전쟁은 미 의회에서 아무런 실제적인 반대에도 부딪치지 않고 진행되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제국은 피지배자들이 품은 분노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 미국은 자신의 근본주의를 최고조로 개방시킴으로써 모든 근본주의를 부흥시켰다. 그리고 폭력으로 물들게 만들었다.

폭력을 끝내기 위한 폭력의 불가능성


만약 하늘이 너를 저버렸다 할지라도,
탓하지 마라.
신은 칼을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니자르 카바니, 〈패배의 서에 대한 주석〉 중에서)

미국 근본주의의 시원은 17~18세기의 뉴잉글랜드다. 처음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온 정치적 난민들이, 그 뒤로는 황금을 좇아온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혼합되었다. 건너온 청교도는 당시 영국의 중산층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식민지에서 새로운 지배층을 꿈꾸며 신세계에서도 구세계와 마찬가지로 노예를 부리는 생활을 그렸다. 애초에 민주적인 평등사회 건설은 목표가 아니었다. 이들의 목표는 구원예정설, 천년왕국 관념, 묵시론적 믿음을 공유하는 신정 정치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그 가능성은 인디언 원주민 학살이라는 군사적 정복과 내부적 제국주의로 발현되었는데, 미국은 시초부터 근본주의적 제국주의ㆍ군사주의로 발전시킬 스스로의 위대함을 정초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자급자족 세계로 있었고 아메리카 지역을 넘어서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고립주의 혹은 중립적 비개입주의는 1917년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시작으로 완전히 변화했다. 참전은 국내에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미국은 전쟁을 통해 세계를 빠르게 인식했고 세계라는 존재가 미국의 의식을 뒤덮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재탄생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곧장 경제적ㆍ군사적 승자로 등극했다. 다른 열강들은 급격히 쇠약해지는 동안 미국의 경제는 유례없이 성장했고, 세계는 미국의 힘과 에너지에 감탄했다. 소련의 영향이 확대되고 세계에서 민족해방운동과 혁명운동이 고조되면서 미국은 세계 정치 무대에서 자유세계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미국은 자본주의 유럽을 재건하고 시장을 다시 만들었다. 산업과 군사기구는 필연적으로 급성장했으며 국내 자원으로는 더 이상 충족할 수 없어 수입에 의지해야 했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 더 많은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강대국이 될수록 군사적 완력을 사용하는 데 그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1929년의 대공황의 경험 이후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것에 광범위한 동의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구군비경제는 창조되었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군사 관련 연구가 고무되었고, 군수산업은 미국을 유일한 구매자로 삼는 상품을 생산했다. 이 산업은 경기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를 창출할 수 있었고, 독점 군수산업체들은 자동으로 이윤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군산복합체는 미국을 전능한 초강대국으로 유지하는 핵심 기구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 군사비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 혼자서 지출하며, 미군은 전 세계 국가의 2/3가 쓰는 만큼의 에너지를 쓰고 있으며, 군사 생산품은 미국 국내총생산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유엔의 190여개 회원국 중 120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고, 7천명의 정부 공무원이 정식 외교 업무로 무기 판매와 관련한 일을 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냉랭한 말처럼 안전하고 자유로운 산업을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군산복합체의 부당한 영향력이 민주주의를 질식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미국은 자본주의의 협박꾼이었음을 고백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성찰,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크게 일었던 베트남전 반전운동 등 군사적 제국주의라는 근본주의에 대해 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1944년에 존 플린은 『우리가 행진할 때』에서 미국의 개입주의를 비판하면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은 영구적인 위기 상태를 혹은 사실상 영구적인 전쟁 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분석한 바 있었다. 그의 예지는 1944년에 제기했을 때보다 오늘날 더욱 적절하게 들린다. “우리에게는 적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 적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경제적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였다는 점에서 정복전쟁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교리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교리와 같다는 점에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의 숙명이 되었다. 물론 세계에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 있는 기독교인이 많으며 이들은 미국의 방식에 비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미국 정치권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적을 만들고,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원초적인 애국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여기에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동원한다. 이는 테러나 폭력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조장할 뿐이다.
서구가 간섭할 때마다 아랍의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전진 또한 후퇴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부시가 대통령 선거 유세 때 생애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예수를 꼽았던 일을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오늘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무슬림을 향한 이야기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2010년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9ㆍ11 사건 10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4개월 전에는 빈라덴 사살이라는 직접 복수가 있었고 미국인들의 환호가 있었다. 행사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말을 전 세계에 유포시킨 그 당시에는 정작 제3세계 곳곳에서 테러에 대한 지지의 물결이 있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브라질의 어느 도시에서는 9ㆍ11 추모 공연장으로 몰려온 젊은이들이 ‘오사마’를 연호해 콘서트가 무산되었고, 그리스의 축구장에서는 경기 시작 전 2분간의 묵념을 관객들이 거부하고 반미 구호를 외쳤다. 미국 내에서도 3세계의 이민자들 중에는 ‘죽은 사람들은 안됐지만 통괘했다’며 슬픔보다 시원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이 오싹한 기운은 오늘날 근본주의와 폭력의 작동 방식에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국가권력이 폭력을 독점한 이래 개인과 집단은 국가폭력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은 강자의 테러이고, 테러는 약자의 전쟁이다’라는 말처럼, 국가 테러는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 이들에게 ‘국가 테러 맞서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적 테러’라는 유혹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인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한 청년이 테러에 동참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천국을 향하여》는 이를 선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세계를 향해 ‘우리 편에 설 것인가, 그들 편에 설 것인가’ 양자택일을 강요한 미국에게 타자화된 무슬림은 어떤 식의 반대가 가능한 것일까?
테러와의 전쟁은 테러를 근절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 정반대가 의도된 것이라면 다음 선택은 무엇일까?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자유’,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 했다. 이라크 전쟁도 이라크의 ‘항구적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명명되었다. 자유를 위해 죽인다,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를 지원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배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설령 이를 믿는다 해도 적이 필요한 그들은 한편으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폭력을 끝내기 위한 폭력은 없다는 것을.
진짜 폭력은 이런 적/아 이분법을 만드는 구도 속에서 자라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악을 명백히 나누는 명확한 이분법이야말로 우리의 감수성을 편협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모든 근본주의는 자유로운 선택과 비판 공간에 대한 배제를 바탕으로 한다. 내부 비판과 반성력을 차단하는 근본주의는 그래서 폭력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폭력이 소통 불가능성을 전제할 때 생겨나는 힘이라고 할 때, 소통을 배제하는 순간 폭력은 뒤따라올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라는 행동 이전의 정치성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들의 게임에 가까이 가지 마라. 그들의 규칙으로 게임을 하지 마라’고 동료들에게 줄곧 호소했던 맬컴 엑스나, 제국주의적 근본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충돌하는 세계에서 이들 근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리크 알리의 이야기처럼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 자신과 자신의 관계를 폭력의 구도에 위치시켜내는 내적 성찰을 요청하는 일일 것이다.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평화도서관 나무',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따비에'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신생 49호'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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