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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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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가지 못하는 혁명의 안타까움, 깊어만 가는 어둠 속 시리아 내전

나아가지 못하는 혁명의 안타까움
- 깊어만 가는 어둠 속 시리아 내전

염창근


만약 하늘이 너를 저버렸다 할지라도,
탓하지 마라.
신은 칼을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니자르 카바니, 〈패배의 서에 대한 주석〉중에서)

2년. 2011년 벽두부터 일어난 아랍의 봄이 시리아까지 나아갔을 때, 어쩌면 누구도 시리아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혼란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부터 강고한 독재정권의 탄압에 민중의 항쟁은 결국 좌절될 것이라고 여겼고 두려움 속에서 지켜보기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위가 내전으로 점점 변해도 정부군의 학살은 무참히 계속되었기에 곧 진압되고 말 것이라고 지레짐작 추측들만 있었다.
오랫동안 시리아 국민은 군사독재가 지속되어도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고 여겨져 왔다. 아랍의 무장투쟁 그룹들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었기에, 아랍을 지키는 몇 안 되는 국가라는 이미지에 만족하거나 혹은 완전히 포섭되어 있다고 보였다. 그래서 아랍의 봄이 꽃 피웠던 2011년을 넘기고 또다시 1년을 넘기고 있는데도 50년이 넘게 강압적 군사독재가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아직까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의아함을 남긴다. 한 번도 민주주의를 가져본 적이 없는 시리아 사람들은 어째서 이토록 오랜 시간 목숨과 삶을 내놓고 버티고 있는 것일까. 아랍의 봄 자체가 의아함을 주지만, 시리아는 훨씬 진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왜 스스로 독재를 무너뜨리지 못하는가’ 하는 외부 세계의 비난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그들이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나왔던 것이다.

시리아의 독재체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해체되고 1·2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며 분할된 시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의 이해관계가 반목하는 나눠먹기에 시달렸고 결국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에는 강한 반서구 정서가 크게 형성되었다. 1946년 독립을 한 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지역 패권 대립 속에 휘둘리며 선택을 강요받았다. 친소련 국가가 되고 난 후에도 미국과 터키,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등 주변의 친미 국가들로부터 전복 시도에 시달렸다. 시리아는 포위당했으며 공격당하기도 쉬웠다. 시리아의 유일한 대책은 더욱 친소련이 되어 군사적 외교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과 지역의 강국이었던 이집트와 유대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시리아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합병에 나섰고 1958년에는 전례없는 국가연합(아랍연합공화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는 동등한 연합이 아니었다. 시리아는 외부의 위협에 직면해 이집트의 보호를 얻기 위해 아무런 조건이 없었던 반면 이집트는 시리아를 지배할 욕심이 있었다. 시리아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정당들이 해체되었으며 장교들 역시 재배치되었다. 경제는 이집트의 조치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시리아는 이집트에 대한 적의만 커졌다. 결국 시리아에서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랍연합공화국은 해체되었다.
시리아는 현재의 독재정권인 바트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이미 수많은 쿠데타가 권력을 향해 연거푸 일어났었다. 당시의 시리아는 토지와 회사를 보유한 상층 계급이 주도하는 2개의 거대 보수정당(다마스쿠스 중심의 민족당, 알레포 중심의 국민당)이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3개의 소수정당(바트당, 공산당, 시리아민족주의당) 정도가 하급계층인 농민과 노동자를 대변한다며 나서고 있었다. 이들 소수정당들은 장교들과 젊은 지식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바트당은 소수정당 중에서는 가장 두드러졌으나 의회나 정부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시리아 장교단의 충성은 매우 컸으며 군사 쿠데타의 막후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해 갈 수 있었다. 군사 쿠데타로 서로 대립하는 사이 정부와 의회는 해산되었고 비상사태법이 발표되었으며 군사독재가 시작되었고 장교단이 정치화되었다.
1·2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의 연이은 패배는 장교들을 더욱 재촉했다. 1963년 마침내 바트당 소속 장교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그 후엔 함께 쿠데타에 나섰던 수니파와 드루즈파 장교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었다. 인구 12% 정도의 알라위파 정권의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공군 사령관이었던 하페즈 아사드는 1967년 3차 중동전쟁의 패배를 기회로 삼아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자디드 계열을 1970년에 쿠데타로 몰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아사드 집안의 세습 독재의 시작점이었다.
아사드 정권의 중앙집권적 일당 독재는 시리아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대통령 체제를 수립했고, 연이은 전쟁 패배와 쿠데타로 혼란스럽던 정국을 단번에 안정시켰다.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비공식 통제기구들과 10개가 넘는 보안국과 정보부대들, 특수부대인 공화국방위대와 전투부대가 차례로 구축되었다. 이를 통해 반대파 인물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이슬람 봉기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한편 하페즈 아사드는 자신의 독재가 알라위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리아·아랍·무슬림 통치자로 보이게 하려고 했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었음을 보이기 위해 선거를 계속 실시했고 고위직에는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수니파도 임명했으며 6개 정당을 의회 선거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는 자신이 유일했고 잠재적 경쟁자라면 형제들조차 제거했다. 거대한 보안국과 정보부대들에는 자신의 친인척이나 마을 출신의 알라위파 인물들만이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회 선거에서는 바트당이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했다.
또한 하페즈 아사드가 사회경제적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졌고 보건과 교육 등 사회복지 분야도 개선되었다. 점점 사업가, 제조업자, 기업가 등으로 구성된 중간계급이 출현하고 이들은 알라위파 장교들과 유대하며 사업상 제휴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점점 예전 바트당의 지지자였던 노동자, 농민, 공공부문 피고용인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빈곤화되었다. 많은 국방비 지출(예산의 65%)로 공공 부문의 서비스는 부족해졌고 부정부패와 비효율, 족벌주의 등이 심화되었다.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실업이 증가하고, 임금이 감소했다. 도시든 농촌이든 빈민층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되어 있지 않았고, 비밀기관과 비밀경찰들에 엄격하게 감시당하고 있었으며, 정부 보조금에 매수되어 있었다. 정권의 반대파 인물들은 물론 정권에 불만을 품은 다른 분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조직되어 있었던 집단은 무슬림형제단의 전투적 분파였는데, 오직 이들만이 정권을 위협했던 유일한 집단이었다.
바트당 쿠데타 이전의 무슬림형제단은 폭력적이지 않은 사회적 종교운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무슬림 교육을 진행하며 다양한 조직들에 속하면서 총선에 참가하기도 했다. 바트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불법화되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지하 네트워크와 전국에 있는 수천의 모스크에서 이루어지는 무슬림 교육 체계 덕택이었는데 이들은 늘 바트당의 정책에 분개했다. 바트당 정책은 이슬람을 국가에서 분리하고 삶을 세속화하며 학교에서 이슬람 수업을 줄이고, 무슬림 성직자를 해고하고 성직자들의 관할권과 소득을 줄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무슬림들은 알라위파를 이교도로 보았다.
무슬림형제단은 주요 도시에서 공개적인 항의, 파업, 시위를 이어갔지만 모두 철권으로 진압되었다. 대신 하페즈 아사드는 수니파 무슬림 주민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종교시설에 대한 예전의 제한을 폐지하고 성직자 신분을 상승시키면서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선포하고 종교적 감정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럼에도 무슬림형제단의 전투적 분파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는데, 1973년에 이들은 ‘타락한 정권’ 하페즈 아사드에 대항해 여러 도시에서 일련의 무장 봉기를 조직했고 성전을 외쳤다. 그러던 중 1975년 레바논 내전이 일어났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장악하려는 계산으로 마론파 기독교도 편에서 무슬림 레바논-팔레스타인 동맹에 군사개입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무슬림형제단은 1977년에 게릴라 공격에 착수, 79년에는 알레포의 군사기술대학을 습격했고, 80년에는 하페즈 아사드 암살을 시도했다.
도시 게릴라와 봉기에 직면해 아사드 정권은 가혹한 탄압 조치를 취하지만 반란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슬림형제단은 1982년에 하마를 점령했고 정부기관들을 습격해 관리들을 살해했다. 하페즈 아사드는 하마에 군을 투입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2~3만명의 시리아 사람들이 죽었다.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무슬림형제단은 반란을 접고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마의 학살 사건은 시리아인들에게 혹독한 교훈을 주었다. 시리아인들은 분노한 동시에 정권에 깊이 겁을 먹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페즈 역시 교훈을 얻었다. 무슬림을 포용하여 흡수하기 위해 해외로 피신한 수천의 형제단 단원들을 사면했고, 다수를 석방했으며, 온건 무슬림 지도자들을 의원으로 선출되도록 허용했다. 이슬람 출판물과 의상에 대한 제한들을 폐지했고 새로운 모스크를 건립했다. 전투적·정치적 이슬람을 온건하고 문화적인 이슬람으로 조장하고자 한 것이었다. 자신이 친이슬람임을 보이기 위해 이란(시아)과 수단(수니) 이슬람 공화국들과 동맹을 강화했고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슬람지하드 같은 조직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시리아의 이중적 행보


시리아는 오랫동안 범아랍주의의 온실이자 아랍 통일의 구심이며 반시온주의 및 반이스라엘 운동의 선구자임을 자임하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시리아는 아랍 통일을 이끌 능력도, 이스라엘을 제거할 능력도 없었다. 군사적인 면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도 지역 강국들보다 취약한 편이었다. 오히려 시리아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위협받아 왔다. 이스라엘과 터키의 위협은 심각했고, 이집트와 이라크의 합병 대상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전혀 군사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고 국경 분쟁에서는 휘말리기만 했고 타격을 입어야 했다.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에 크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는 곧 미국의 적대와 전복의 표적이 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소련의 엄청난 군사 지원을 받고 벌인 4차 중동전쟁도 패배하자 하페즈 아사드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시리아와 아랍세계는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스라엘과 정치적 협상과 타결로 자신의 소유지였던 골란고원을 수복해야 한다는 점,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후원이 필요하며 미국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골란고원을 돌려주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시리아의 안전보장은 소련과 전략적 군사동맹을 유지하면서 두 열강 사이에서 적절히 타협하고, 미국과 이스라엘과 협상을 벌이는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시리아는 표면적 수사와는 달리 이제 누구와도 협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레바논 점령으로 다시 고립되기도 했지만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시리아에게 결정적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아랍주의를 더럽히더라도 미국이 이끄는 군사연합에 참여했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함께 몰아냈다. 시리아가 얻은 수익은 실질적이었데, 하페즈의 경쟁자인 사담 후세인은 전범이 되었고 시리아는 타 아랍국가들로부터 많은 재정 지원을 얻어냈고 레바논에서는 반시리아 마론파 지도자를 쫓아낼 수 있었다. 미국은 암묵적으로 시리아의 레바논 지배를 승인했고 미국과 정상회담을 한 후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에 변화도 이끌어냈다. 그러나 협상은 하페즈의 사망으로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 바샤르 아사드는 아무런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협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바샤르 아사드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까지 하면서 친미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지만, 오히려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전통적 전략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시리아는 아랍을 지키는 나라로서의 시리아가 아니었다. 시리아는 화려한 반이스라엘 수사에 의존했지만, 존속을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며 안간힘을 썼다. 시리아 국민은 그 과정을 지켜보아 왔고 이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항쟁과 내전


하페즈 아사드의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정권을 넘겨받을 때에는 시리아인들은 영국 유학파 출신 바샤르에게서 개혁을 기대했다. 바샤르 역시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했고, 특히 700명의 정치범 석방은 인권 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게 했다. 바샤르는 실제로 일정 정도 후진적인 시리아 경제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했고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최초로 허용하기도 했다. 서구에서 교육받은 경제인을 고위직에 임명하기도 했고 현대적 은행체계, 인터넷, 휴대전화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여전히 집회, 언론, 출판의 자유가 없는 억압적 정치체제를 유지했지만 지식인들의 요구로 정치단체와 일부 신문에 약간의 표현의 자유를 최초로 허용하기도 했다.
바샤르가 집권하기 시작한 2000년부터 시리아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은 비상사태법과 계엄법 해제, 집회 언론 출판의 자유, 감시단 중단 등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다양한 운동을 벌였다. 바샤르는 초기에는 이를 관대하게 대처했으며 일정한 변화를 도입하려고 했었다. 관리직에 대해 임명 대신 선거가 준비되었고 관리의 특권도 폐지했다. 외국 영화의 수입을 허용하고 신문 발간 및 사립대학 설립도 허용하는 등 제한적이나마 가혹했던 조치들을 완화하려 했다. 그러나 기존의 보수적인 구세력이 개혁을 막았고 점점 다시 권위주의 독재 상황으로 돌아갔다. 결정적으로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악의 축’ 규정으로 개혁의 바람은 완전히 사라졌고, 전쟁 위협에 맞선 비상 정국으로 돌아왔고 군의 주도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억압적 독재체제는 온전히 가동되었다.
그리고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 도달했던 2011년 3월 15일, 시리아 남부 도시 다라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장 시리아 곳곳으로 확산되었고 규모도 점점 커져갔다. 초기에는 정치범 석방, 부패 근절, 공공 부문 개선, 민주화 정도가 시위의 요구였다. 바샤르 아사드도 아랍의 봄의 여파를 의식해 열흘만에 국가비상사태법 폐지 및 대체법안 검토, 정치 참여 기회 확대 등을 담은 개혁안을 발표하며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다음날 금요예배를 마친 시리아인들이 집결해 ‘존엄의 날’ 시위를 벌였고 다라에서는 5만 명이 모였다. 여기에 시리아 군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100여명 죽으면서 시위는 정권 퇴진으로 나아갔다.
시리아 시위도 다른 나라의 민중 항쟁과 똑같이 초기에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새로운 젊은이들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미 보편화된 인터넷과 휴대폰, 위성방송과 스카이프, SNS를 통해 외부 접촉면이 넓어진 세대였다. 이들은 가혹한 독재와 부패, 인권 탄압, 빈곤과 실업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설 마음을 먹었다. 시위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으로 폭력을 고집하고 있는 정권의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시위로 운동이 이어졌으며 중산층 시민, 좌파, 자유주의자, 무슬림, 반정부 세력 등 다양한 부류와 그룹에서 이 시위에 합류했다. 그러나 정권에 대항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역사의 교훈으로 알고 있었던 기존 세대는 침묵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
시리아 정권은 겉으로는 유화 조치와 민주화 조치를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포격, 저격, 살인 등 학살을 자행했다. 수만명이 죽었고 구금되었다. 현실은 참혹함으로 채워졌다. 시리아 정권은 군대와 민병대를 동원해 학살했고 이에 맞서 반군이 조직되고 무장했으며 결국 내전으로 변했다. 정권 반대세력의 연합체로 결성된 시리아국가위원회(SNC)와 자유시리아군에는 무수한 그룹과 개인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이해가 엇갈렸다. 아랍권의 정권과 국제사회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정부와 반정부로 양분되었고 그 대리전을 치루고 있다. 이 속에서 시리아 사람들의 삶은 외면받았다.
전쟁이 양극단만 버려내게 하듯 학살 속에선 분노와 혐오감이 깊어졌고 내부의 다양한 그룹의 목소리는 자리를 잃게 했고 강경한 입장만이 남게 만들고 있다. 점점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 민중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갈 수도 있다. 시리아 민중의 헌신적인 비폭력 저항은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내재되었던 갈등이 증폭된 채 채워졌다. 그 갈등은 드러날 필요가 있었고,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살로 일관하는 독재정권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 과정은 수많은 시리아 사람들을 처참한 전쟁 속으로 몰거나 죽거나 집을 떠나 난민이 되거나 숨을 죽이게도 했다. 무력 분쟁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참사는 더욱 참혹해질 것이고, 상상하기도 힘든 폭력 사태는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깊은 증오들을 계속해서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랍의 봄의 시작과 끝, 그리고


외부의 인식과 달리 아랍 세계는 종교의 틀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세계가 아니었다. 권위에 잘 굴복하고 독재를 당연히 여기던 세계도 아니었다. 아랍 사회들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을 알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근대성을 받아들였다. 이슬람을 역사로서 존중했지만, 조직화된 종교는 시대착오임을 깨달았다. 전쟁과 혁명의 열기를 느꼈고 다양한 운동들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흐름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이 운동들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했고 유럽의 식민 지배 시기에는 강력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지난 세기 대부분의 아랍 사회에는 공통적으로 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운동 세력을 형성했다. 계속된 전쟁 패배와 강대국의 지배에 맞서 주로 좌파 공산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대안이었다. 자유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았음에도 강력한 조직적 운동이 되지 못한 탓에 주로 공산주의와 협력했다. 이슬람 종교는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던 시기에 크게 신경써야 할 배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 특히 미국은 아랍 사회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자기의 이익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좌파 공산주의나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자본주의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을 지원했는데, 한편으로는 미국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왕들과 독재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주의가 그들이었다. 이슬람의 규정에서 이탈해 좌파적으로 세속화되어 가던 아랍에 미국은 이슬람 지하드 개념을 역이용했고 비밀공작들을 펼쳤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미국이라는 악보다 자국의 세속 정부라는 악을 먼저 척결해야 했고 서구의 지원 덕분에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 될 수 있었다.
4차례의 중동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에 의해 먼저 좌파와 자유주의가 제거되었다. 성직자들은 민주주의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나라에서 좌파 정부가 전복되었고, 시리아·이라크·이집트·요르단 등 군주정들과 독재정권들은 연명했다. 그 다음에는 민족주의가 이슬람주의에 굴복했다. 사다트의 뒤를 이은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로 사회·문화적 영역을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게 넘겼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브주의가 지속되었고, 이란과 아프간에서는 성직자들과 근본주의가 권력을 잡았고, 알제리 등 많은 나라에서는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대중적으로 등장했다. 결정적으로 1991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차원이 다른 전쟁으로 단번에 군사강국 이라크를 제압한 걸프전에서 미국의 힘을 목격한 아랍 세계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근대적 추진력들이 패배하는 동안 이슬람주의는 곧바로 그 자리를 메웠다. 확성기를 단 모스크는 깊은 신앙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조직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비판적 지성은 위축되었고, 이슬람은 경직되고 퇴행적인 무기로 변해갔다.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은 카페에서 끊임없이 만났지만 어디까지나 거기서만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위대한 시인들이 남아 있었다. 긴 어둠의 시기 아랍 세계에 경직된 이슬람주의가 아닌 비판적 정신의 명맥을 이어갔던 것은 망명한 시인들이었다. 시리아 태생의 니자르 카바니, 팔레스타인 태생의 마흐무드 다르위쉬, 이라크 태생의 무타파 알나왑 등 시인들은 강대국들의 침략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아랍 사회 내부의 문제를 비판했다. 카바니가 1967년 전쟁이 끝나고 쓴 〈패배의 서에 대한 주석〉이라는 시 20편은 누구도 예외로 삼지 않고 아랍의 모든 지도자들을 비판했고 끝까지 비판적 지성을 견지했다. 시인들의 시는 아랍 각국의 정부로부터 판금되었지만 아랍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었고, 아랍의 가장 유명한 가수들이 노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6년에 TV방송 ‘알자지라’가 등장했다. 알자지라의 기자들은 정치적 배제 없이 모든 이들을 인터뷰하며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고 밀도 깊은 토론의 공간을 열었다. 알자지라는 아랍 세계의 잘못된 점을 냉정하게 분석함으로써 대중의 의식을 고양시켰고, 중동에서의 전쟁과 분쟁 취재는 서구의 메이저 매체조차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그 현장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다. 매체라고는 국영매체밖에 없고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곤 들어본 적이 없었던 중동의 아랍인들은 즉각 모든 국영 방송매체를 끊고 알자지라로 옮겨 탔다. 알자지라의 기자와 토크쇼에 출현한 인사들은 아랍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카타르를 제외한 아랍의 왕들과 독재자들은 극도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위기감을 표출했다.
그 다음에는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보급되었다.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교육받은 젊은 세대들은 절망적인 자신의 사회를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공유했다. 자유, 존엄, 민주주의, 사회정의라는 동일한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이것들은 기본적 자유가 없었던 오랜 독재 사회를 함께 보게 만들었고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공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다.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 예멘, 바레인, 요르단, 시리아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일어난 2011년 민중의 봉기는 전혀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다. 독재와 부패, 가혹한 인권 탄압, 빈곤과 빈부격차를 철폐하기 위해 그동안 숨죽이며 살았던 이들이 분노와 모멸감을 스스로 넘어서기로 했다. 아랍의 봄은,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독재정권뿐만 아니라 이슬람 종교까지 각종 권위주의를 문제 삼았다. 이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이 아니었다. 자기네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었다. 대부분이 군주제의 왕정이거나 군사독재정권인 중동의 지배층은 더없이 놀랐고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분주했다. 그러나 아랍의 민중은 중동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미국과 유럽은 겉으로는 이 혁명과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친미의 왕정들만은 지키고자 애를 썼다. 민주주의와 민간인 보호를 명분으로 리비아 등에는 군사개입을 하면서도 왕정 군주들의 민주화 시위 진압은 일관되게 묵과했다. 오직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잃지 않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봉기가 한창이던 5월 1일, 갑자기 빈라덴을 사살했다. 아랍의 봄에 대한 미국의 이 화답을 시리아 저널리스트 마르얌 하산은 이렇게 정리했다. “억눌려 있던 아랍 세계가 현대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적인 투쟁을 통해 역사의 새 장을 넘기는 시점에 빈라덴이 사살됐다.”
아랍의 혁명과 봉기에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존재는 없었다. 아랍의 봄은, 아랍의 새로운 세대들은 이슬람주의 방식이 변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주의를 원하지도 않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포장하는 빈라덴 사살은 그동안 진행되어 온 테러와의 전쟁의 정당성과 중동 패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내민 카드였다. 혁명과 봉기 중에 사라졌던 이슬람주의에 새로운 보복의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다시 번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미국에 협력해 온 친미 독재국가들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다. 아랍 민중에게 넘어가던 중동의 새 흐름은 미국의 빈라덴 사살과 서구의 리비아 군사개입과 맞물리며 급속히 수그러들었다. 결국 미국은 적대적 공생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슬람주의는 다시 이 지역에 지배적 위치를 회복해 갔다.
혁명과 봉기 기간 중에 사라졌던 이슬람주의는 다시 살아났고 동시에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해 온 친미 독재국가들은 제 힘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예멘의 경우 퇴진을 약속한 살레 대통령이 버티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 되어 주었다. 시리아에 대한 외부의 입김들은 민중의 요구를 가라앉히며 세력 다툼으로 변질시켰다. 친미-반미의 독재체제가 존속한 중동에서 민중의 힘으로 이를 넘어갔던 아랍의 봄은 미국의 영향력 약화, 대테러전의 약화, 석유자원 접근 약화로 귀결될 수 있었기에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지만 기존 질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도 분명 변화는 일어났다. 새로운 세대와 시민들이 자신의 힘을 실체화했고 따라서 시민사회가 성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년 4월 연극을 가지고 한국에 왔던 연극연출자 오마르 아부 사다의 말처럼, ‘자유를 찾는 여정에서 우리는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이 아랍의 봄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고 있다. 이점이 결국 다시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것이며, 시리아의 평화도 만들어갈 것이다.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평화도서관 나무',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따비에','무기제로'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참세상'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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